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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편의를 담보로 미래와 가치를 포기하다

[시사브레이크 = 안중열 편집국장]

실제 사람처럼 고객의 주문을 받는 웨이터 로봇, MRI 차트를 보고 환자의 건강 상태를 판별하는 로봇이 등장한단다.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지성을 대체할 수 있는 수준까지 발전했다는 소식으로 전 세계가 들썩이고 있다. 앞으로 또 얼마나 더 발전할 것인지도 관심사가 아닐 수가 없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바둑대결을 앞두고 인공지능이 이젠 우리의 삶 속 깊숙이 들어오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필자는 오늘 이세돌 9단(33)과 구글 인공지능 ‘알파고’ 첫 대국이 시작되면서 뜨거운 화두로 떠오른 ‘인공지능’을 보면서 문득 부작용들을 생각하게 된다. 문명의 이기에 빠진 채 ‘현재의 편익을 위해 미래의 가치를 포기를 하고 있지 않나’ 하는 걱정 말이다. 그냥 기우일까.

   
▲ 일본 로봇 엑스포의 인간형 로봇.

이제는 네비게이션 없인 초행길을 떠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도로에는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지만,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뿐더러 굳이 챙겨볼 필요도 없다. 여기에 스마트폰에 탑재된 ‘T맵’이나 ‘김기사’ 등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 같은 목소리로 우리의 안전하고 편안한 운전을 도와주니 말이다.

가깝게는 집 앞에 위치한 마트에서의 장을 보는 것조차, 지근에 있는 헬스클럽을 찾는 일조차 자동차 없이는 제한이 걸리곤 한다. 운전을 시작하면서 움직이는 것조차 자동차 없인 불편해지는 등 생활패턴의 변화가 생긴 지 오래다. 가벼운 짐을 조금 들고 걷는다고 우리의 건강이 악화되거나 크게 손해를 볼 일도 없건만, 자동차라는 운전수단은 걷는 것조차 기피하는 현상을 만들고 있다. 순간의 편의에 몰입된 채 미래의 건강한 관절이나 호흡기를 담보하고 있는 자충수에 빠진 격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문명의 이기로 인해 언제부턴가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낯가림에, 새로운 도전은 불확실한 상황에 대한 불안감에 가로 막히는 것 같다. 급변하는 사회현상도 그 원인이 될 수도 있겠으나 네비게이션 등 문명의 이기는 도전이란 단어 자체를 무색하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더 이상 ‘젊음’이나 ‘열정’ 등의 단어가 환영을 받는 시대가 아니다. 문명의 이기에 빠진 사회는 땀과 노력의 가치를 실종시키고, 첫 번째도 두 번째도 ‘편의’만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문명 이기의 이중성은 단순히 자동차나 네이게이션 등을 사용하면서 나타나는 부작용에서만 접하는 건 아니다.

지난 2009년 개봉돼 화제가 됐던 독립영화 <워낭소리>를 살펴보자.

문명 이기의 이중성을 경고한 대표적인 작품인 <워낭소리>는 마흔 살을 넘긴 채 생명의 끝에 선 소와, 평생 이 소와 함께한 할아버지의 일상을 이야기한다. 작품에서는 신구갈등과 인간의 이중성을 ‘워낭소리’로 전달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갈등, 기계문명의 갈등이 혼재되면서 죽음을 앞둔 소는 갈등의 원흉으로 대두된다. 버릴 수도 안고 갈 수도 없는 신구갈등이 일어나면서 심각한 인간의 이중성을 경고한다.

이는 치매를 앓거나 생의 마감을 앞둔 어르신을 모시는 집안이라면 종종 일어나는 갈등이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인간의 이중성 문제로 부각되는 사례이기도 하다. 부부관계가 악화되고 형제 간 우애는 금이 간다. 그리고 모든 갈등의 원흉은 고스란히 영화 ‘워낭소리’에 출연하는 소와 같은 어르신이 된다. 그 과정에서는 분명 지키려는 자와 포기하려는 자 사이에서 대립구도를 형성한다. 마치 소를 두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처럼 말이다.

영화 ‘워낭소리’나 ‘치매 어르신’의 예가 과연 문명 이기의 이중성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라. 평생 헌신한 소와, 평생 가족의 뒷바라지를 하며 희생해 온 부모를 지키는 건 인간이라면 응당 져야 할 책임이자 가치이다. 그런데 그게 힘들다고 헌신짝처럼 저버린다면 문명 이기에 사로잡힌 현대인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상황만 다를 뿐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일은 거부하겠다는 것 아니겠는가.

오늘날 문명의 이기는 인류의 편의를 증진시키지만, 이를 어떻게 사용할까 하는 부분은 앞으로 숙제로 남을 것 같다. 요리도구가 될 수도 살인도구로 전락될 수도 있는 칼을 누가 쥐느냐가 중요하듯 말이다. 그런데 단순히 몸을 편하게 하는 칼 등 물질적 가치만으로 문명의 이기를 논하기엔 한계가 있다. 새로운 문명 이기를 긍정적이고 유용하기 위해 사용법을 익히지만, 규제와 제도에 갇힌 채 사회적 가치를 실종하는 오류를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 한겨례신문 '김영훈 기자의 생각줍기' 갈무리.

“가끔 ‘문명’이란 껍데기는 배설조차 자유롭지 못할 때가 있다.”

과거 한계레신문 김영훈 기자가 ‘생각줍기’를 통해 인류 문명 이기의 이중성을 날카롭게 짚은 메시지가 문득 생각나는 시간이다. 전문가들은 인공지능이 일자리를 포함해서 인간을 위협하고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윤리 가치를 깨뜨릴 수 있는, 이른바 ‘문명 이기의 이중성’에 대해 경고한다. 그리고 당신에게, 그리고 내 자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문명의 이기 앞에서 편의를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가치를 간직할 것인가.

안중열 편집국장  jyahn@sisabrea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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